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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23-12-06 23:19 조회 348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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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분경(盂蘭盆經)
우란분경(盂蘭盆經)
이 경전의 원제는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이며 서진시대(西晉時代)의 월씨국(月氏國) 삼장(三장) 축법호(竺法護)가 한역(漢譯)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대(唐代)의 저명한 학승 규봉종밀은 본 경의 주석서인 《불설우란분경소(佛說盂蘭盆經疏)》(大正 권39)를 남기고 있을 정도로 동아시아 한역 불교 문화에 큰 영향을 남기고 있는 경전이 바로 《우란분경》인 것입니다.
《우란분경(盂蘭盆經)》은 《목련경(目連經)》과 함께, 목련존자가 악업의 과보로 인하여 지옥의 고통을 겪는 어머니를 구하는 목련구모(目連救母)를 주제로 삼고 있는 대중경전입니다.
《목련경》의 세밀한 주제 전개와 지옥 묘사에 비해 《우란분경》은 우란분재(盂蘭分齎)의 의미를 비교적 간략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품 1. 목련의 슬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대목건련(大目건連)은 처음 육신통(六神通)을 얻고 나서 부모를 제도하여 낳아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깨달은 눈(道眼)으로 세간을 살펴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죽어서 아귀(餓鬼)로 태어났고 음식을 먹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하여 차마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목련은 슬픔을 가다듬고 발우에 밥을 가득 담아 아귀가 된 그의 어머니에게 잡수시게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발우의 밥을 받아들고서 왼손으로는 다른 아귀들을 쫓고 있었으며 오른손으로는 밥을 움켜 먹고 있었다.
그러나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밥은 이미 불덩어리가 되니 그의 어머니는 끝내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목련은 이를 보고 슬피 울다가 급히 돌아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어머니는 악업의 뿌리에 깊게 얽혔으니 그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느니라. 그대가 비록 부모에 대한 효도하기로서는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으나 그대의 힘만이 아니라 천신(天神)이나 지신(地神),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도사나 사천왕신(四天王神)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고 오직 시방의 대중스님들의 위신력이라야 비로소 구할 수 있으리라.
내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어머니를 구제하는 법을 설하여 온갖 고난에서 벗어나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게 하리라.
품 2. 아귀를 구하는 방법
시방의 대중스님들이 자자(自恣)하는 7월 15일에 마땅히 칠세(七世)의 부모와 현재의 부모, 그리고 모든 액난을 겪고 있는 중생을 위하여 온갖 음식과 과실을 갖추어 큰 그릇에 담고 향유로 불을 밝히고 자리를 와구(臥具)로 깔지니라.
그리고 세간의 훌륭한 공양구(供養具)를 모두 갖추어 그릇에 담고 시방의 모든 대덕스님과 여러 스님들을 공양하여라.
이날은 산 속에서 선정(禪定)에 들었거나 혹은 사도과(四道果)를 얻었거나 혹은 나무 밑에서 경행(輕行)하거나 혹은 여섯 가지 신통이 자재하여 성문(성聞)이나 연각(緣覺)을 교화하거나, 혹은 십지(十地)에 이른 대보살이 방편으로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그 모든 거룩한 대중들과 함께 있어서 한마음으로 발우에 담은 공양을 받게 되느니라. 청정한 계행을 갖춘 스님들의 도는 그 덕이 바다와 같이 넓고 깊으니라.
이날 자자(自恣)를 하신 스님들께 공양하는 중생은 칠세의 부모와 육종친속(六種親屬)들이 모두 삼도(三途)의 고통스러운 길에서 벗어나고 해탈을 얻으며 의식(衣食)이 저절로 갖추어지게 될 것이니라.
만약 현재의 부모가 살아 있다면 부모의 복락이 백 년에 이를 것이며 이미 죽었다면 칠세의 부모까지 천상에 나고 자재하게 태어나 장엄한 하늘의 광명 속에 들게 되어 한량없는 기쁨을 누리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시방의 여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대중들이 우란분의 공양을 받을 때에는 반드시 공양을 올린 사람과 그 가정, 그의 과거 칠세 부모를 위하여 축원을 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선정에 든 후에 공양을 받을지니라.
처음 공양을 받을 때는 먼저 부처님 앞에 올려놓고 대중과 함께 축원을 한 다음 공양을 받을지니라."
이때 목련비구와 법회에 모인 대보살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으며 목련비구의 슬픔은 사라졌다. 이때 목련비구의 어머니는 일 겁 동안 받을 아귀의 고통에서 해탈하였다.
품 3. 현재의 부모와 칠생의 부모를 위한 공양법
이때 목련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자를 낳은 부모는 이제 삼보의 공덕과 대중스님들의 위신력을 입었습니다. 만일 다가오는 세상에 모든 부처님의 제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를 행할 때, 이 우란분재의 법을 마땅히 행하여, 현재의 부모와 과거 칠세의 선망부모를 구하여 제도하여야 옳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옳은 물음이로다. 내가 말하려는 바를 그대가 묻는구나. 선남자여, 만일 비구, 비구니, 국왕, 태자, 왕자, 대신, 재상, 백관이나 모든 백성들이 효순의 도를 행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현세에 낳아준 부모와 과거 칠세의 부모를 위하여 스님들이 자자(自恣)하는 칠월 십오일에 온갖 음식과 공양구를 그릇에 담고 자자(自恣)에 참석하신 스님들께 공양하고 축원을 해야 하느니라.
그러면 문득 현재 부모의 수명은 백 년에 이르고 병이 없을 것이며 모든 고통과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라. 또한 과거 칠세의 부모가 아귀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나서 끝없는 복락을 누리리라."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여러 선남자 선여인들이여, 그대들이 부처의 제자로서 효순의 도를 닦는 자라면 마땅히 생각생각마다 항상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여라. 현생의 부모와 과거 칠세의 부모를 위하여 해마다 7월 15일에는 우란분재를 행하여라. 항상 효순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낳아 기른 부모와 과거 칠세의 부모를 생각하고 공양구를 지어서 부처님과 스님들께 올리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낳고 기르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토록 하여라. 모든 불자라면 마땅히 이 법을 받들어 행하여야 하느니라."
이때 목련비구와 사부대중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우란분경』을 근거로 하여 지옥과 아귀보를 받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베풀어지는 불교의례. 법회.
접기/펼치기내용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도 한다. 오람바나(烏藍婆拏, Ullambana) 또는 도현(倒懸)이라고도 번역한다. 『우란분경』은 부처님의 수제자인 목건련(目犍連)이 아귀도(餓鬼道)의 고통을 받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도한 효성의 덕을 기린 경전이다. 목련존자가 육신통(六神通)을 얻고 그 열린 혜안(慧眼)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았더니, 어머니는 아귀보를 받아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목련은 자기가 얻은 신통력으로 어머니를 아귀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업(業)이 두터워 구원할 수 없었다. 이에 목련은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줄 것을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의 자자일(自恣日)인 7월 15일에 과거와 현재 7세(世)의 부모를 위하여 부처님과 승려에게 백 가지의 음식과 다섯 가지의 과일 등을 정성스럽게 공양을 올리면 비원(悲願)의 성취는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도 천계(天界)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목련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였는데 이것이 우란분재의 시초이다. 이 법회는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양무제(梁武帝)가 동태사(同泰寺)에 행차하여 이 재를 설한 이후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우란분재를 설하였다. 이 행사는 7월 15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행하여졌고, 민속화된 행사로 정착되어 승려와 일반인들이 함께 우란분재를 설치하여 공양을 올렸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신라시대부터 우란분회가 성해 왔다는 설은 있으나, 그 의식이 행하여졌던 사실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우란분재를 595년과 657년에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연대는 신라의 진평왕과 무열왕 때에 해당하며, 특히 6세기 말로부터 7세기 초의 기간은 이미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가 한창 뿌리를 내릴 때였으므로, 일본사에 기록된 불교적 행사라면 당연히 삼국에서도 그 의식이 행하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 재가 개설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106년(예종 1)에는 장령전(長齡殿)에서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바라면서 이 재를 베풀었고, 1109년에는 장령전에서 우란분재를 설치하여 공양을 올렸으며, 1153년(의종 7)에는 봉원전(奉元殿)에서 개설하였다. 또, 1285년(충렬왕 11)에는 왕이 신효사(神孝寺)에서, 1297년에는 공주와 함께 광명사(廣明寺)에 행차하여 설하였으며, 1356년(공민왕 5)에는 내전(內殿)에서 우란분재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부모를 비롯한 조상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서 7월 15일에 개최되었다. 이 밖에 왕실 밖이나 각 사찰에서의 우란분재도 많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전래되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고려 왕실에서 설하였던 그 의식의 절차라든가 그에 따른 기구 등에 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배불정책에 따라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서민층과 부녀자의 생활을 지배하였고, 불교행사는 여전히 중대한 행사로 민중화되었다. 특히, 사월초파일의 연등과 7월 망일(望日:보름날)의 우란분재는 1년 중에서 가장 큰 행사로 민중 속에 남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398년(태조 7) 7월에 흥천사(興天寺)에서 이 재를 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우란분재에 대하여 “서울의 비구니 사찰에서는 7월 15일에 백 가지의 꽃과 과일을 모아서 우란분회를 베푼다. 일반 가정집의 부녀자들이 모여서 쌀과 곡식을 바치고 돌아가신 부모의 영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승려들은 거리로 나가 중생을 위하여 탁발을 베풀었다.”고 하여 조선 초기 우란분재의 모습을 소상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 법회는 점차 일반화되고 민속화되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7월 14일의 백중날에 각 사찰에서는 죽은 이를 위하여 망자의 위패를 불단에 세우고 재를 모시며, 재가 끝나면 그 위패를 불사르는데, 이 의식은 일반 가정집에서 제사지내는 의식과 똑같다고 기록하였다. 현재에도 각 사찰에서는 7월 15일을 백중날이라 하고 그에 따르는 의식법회를 진행하여 오고 있다. 결국, 목련의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하여 베풀어진 우란분회가 현재는 백중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서 그 법요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백중일은 백종(百種, 百經)이라고도 불리는데, 원래 이날은 매년 4월 15일부터 시작된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다. 그 때 의심이 있으면 스승에게 물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대중에게 그것을 이야기하는 날이기 때문에 백중일(白衆日)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백종은 7월 15일에 농민들이 농사일을 거의 마치고 휴식을 하면서 한자리에 모여 노는 풍습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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