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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어 법문 지리산 서암정사 원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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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2-12 11:59 조회 28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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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조심하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 [기획/수행의 향기] 서암정사 회주 원응스님 百千江河萬溪流 同歸大海一味水 森羅萬象各別色 還鄕元來同根身 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냇물, 바다에 가니 한 물 맛이로다. 삼라만상 온갖 모습이여, 고향에 돌아오니 본래 한 뿌리이니. 사진설명: 석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원응스님은 1960년대 지리산에 들어와 지금껏 벽송사를 중창하고 서암정사를 세우는 불사 속에서도 화두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지리산 서암정사(瑞精舍) 초입에 들어서자 3미터 가량 되는 화강암 두 기둥에 적힌 글귀가 먼저 반긴다. 셀 수 없이 많은 강과 하천도 바다로 들어가면 한 맛이듯 삼라만상도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하나라는 뜻이니 기자는 이제부터 화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바위에 사천왕상이 새겨져있다. 경주 석굴암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했다는 사천왕상은 자연바위에 일렬로 새긴 점이 남다르다. 사천왕상을 지나 동굴처럼 만들어진 ‘대방광문’(大方廣門)에 들어갈려는 순간 ‘어서 오라 중생이여 이곳이 네가 편히 쉴 곳이니라( 善來衆生 此處安樂)’라며 동자상이 반긴다. ‘비로궁’을 빠져나오면 넓은 화엄의 세계다. 망망무제로 펼쳐진 지리산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탁 트인 경내를 크고 작은 바위들이 둘러싸고 있다. 어디까지가 자연석이고 어디가 인간의 힘이 닿은 곳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돌들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서있다. 서암정사의 불보살 신장들은 모두 바위에 새겼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석굴법당인 극락전 안 여덟보살과 십대제자, 십장생 동식물 등 ‘극락세계’가 조각되어있고,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문수 보현보살,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도 모두 바위에 새겼다. 넋이 반쯤 나간 채 경내를 살피고 나오는데 키가 크고 검게 그을린 구릿빛 노스님이 주장자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다. 큰 절 격인 벽송사를 중창하고 서암정사를 만든 원응(元應)스님이다. 40여년전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던 비극의 땅 지리산을 ‘안양’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3년전 서울에서 ‘화엄경금니사경전’을 할 때 뵙고 처음이다.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방광불화엄경〉 58만7261자를 금니사경한 작품을 서울 부산 등지에서 전시했었다. 〈화엄경〉 전문 59만8000여자를 한 자씩 한지에 옮겨 적는데 5년, 감지(柑紙. 닥종이)를 그 위에 덧대고 곱게 빻은 금가루를 붓끝에 묻혀 이를 다시 적는 금사(金寫)에 5년이 걸린 대불사였다. 남북분단으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고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써내려간 금니사경은 스님을 40여년만에 처음 외부를 향해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3차에 걸친 전시회를 마친 뒤 스님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여태 두문불출이다. “늘 부족하고 큰 소리 칠 일도 없어, 결코 ‘이 뭐꼬’서 벗어나서는 안돼” 스님은 “한 말씀 듣기위해 왔다”는 말에 “그런 이야기는 해줄 게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40여년간 지리산에 은둔하며 불사와 수행에만 매진해온 스님이다.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그 말문마저 닫았다. 스님은 하지만 출가와 사찰 불사에 얽힌 애기는 사양하지 않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처사님께 처음 보여준다’는 만공스님이 스님의 선친께 전해준 전법게,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을 대신해서 손상좌인 석호스님에게 써준 전법게, 석호스님이 제자 석암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등 귀한 자료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스님은 선친의 권유에 따라 불문에 들어섰다. 일제시대 엘리트였던 부친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이른바 ‘출세’길이 차단되었다. 이때부터 부친은 참선에 매진, 선사들 사이에서도 재가거사로 그 명망이 높았다. 만공스님은 부친에게 친히 법을 내리고 법명을 부여했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화두도 내렸다. 못다한 출가의 꿈은 자식이 잇기를 원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속공부는 부귀공명이 전부이지만 부처님 공부는 영원한 진리를 취득하니 생사를 벗어난다. 부처님 문중에서 일대사를 터득하면 세상이 다 부러워하는 대통령 자리가 부럽겠는가.” 그렇게 해서 원응스님은 여러 경전을 읽고 참선을 하다 부친과 평소 교류가 있던 석암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됐다. 부친은 자식을 선암사에 보내면서 ‘이 뭣고’ 화두를 주었다. “경전을 보려면 집에서 보는 게 낫고 참선할게 아니라면 집에서 철학책이나 보면 된다”는 말과 함께. 그때가 전쟁이 막 끝난 뒤인 1954년이었다. 스님 나이 석암스님은 아버지로부터 ‘이 뭐꼬’ 화두를 받아온 젊은 청년에게 몇마디 묻고는 “그렇게 공부해라”며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후 스님은 성철스님을 모시고 참선수행하는 등 제방을 돌며 참선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사찰에 올 때부터 괴롭히던 ‘늑막염’이 끝내 말썽을 부렸다. 용맹정진 등 몸을 돌보지 않고 공부하다보니 각혈까지 하는 등 몸이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대중생활을 더 이상 잇기 힘들어졌다. 스님은 시끄러운 부산을 떠나 홀로 공부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다 지리산을 찾아들었다. 스님은 “지리산 올적에는 집 고치러 온 것이 아닌데 살다보니 일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리산중에 머문 50여년은 불사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화두참구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은사스님께 나아갔다. 은사스님은 소견이 좀 열렸나 하면서 “십겁을 앉아있어도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했는데 자네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라고 물었다. 제자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불법이 나타나면 헛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심성이 허공과 같아 필경 안과 밖이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법을 요달할 것 같으면 거짓도 참도 아니로다(心性如虛空 畢竟無內外 了達如是法 非僞亦非眞)”라는 전법게를 내렸다. 스승은 “그 소견을 잘 가지고 공부에 더 매진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은사스님도 스승이신 석호스님에게서 그와 비슷한 내용의 전법게를 받았었다. “너도 나도 본래 마음이 없는데 전할게 있고 받을게 있나. 손 없는 사람에게 전한다”는 내용이다. 경허스님이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던, 혜월스님의 법이 석호-석암스님을 통해 원응스님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대중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논을 개간하고, 밭을 갈고, 소를 키우던 혜월스님의 가풍을 닮은 까닭인가. 원응스님도 반세기를 한 곳에서 땅을 갈고 돌을 캐며 가람을 세우고 다듬었다. 또 스승들처럼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님은 하지만 겸손했다. “돌이켜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이 불조의 말씀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만큼 공부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님은 “늘 부족하고 큰 소리 칠 일도 없다”며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이 뭐꼬서’ 벗어나서는 안될 생활 뿐”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끝으로 “항상 조심하는 것이 공부인의 자세인데”라며 “잡소리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며 말문을 닫았다. 스님을 친견하고 돌아서는데 ‘사자굴’ 이 막아선다. 獅子窟裏大睡漢 時到一吼震四海 사자굴안에 잠든 놈이여, 때가 이르러 크게 한번 부르짖으면 사해를 진동하리라 함양=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원응스님, 벽송사와 서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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